레드퀸의눈물/길고

안부를 묻다

엘빈 2009. 7. 23. 12:38

 

막상 이렇게 펜을 들고 보니 그간에 안으로 삼키고만 말았던 그 수많은 말들은 죄다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지금 눈앞에 놓인 종이의 흰 여백이 부담스럽다 못해 막막할 지경이다.
잘 지내니.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번에도 이쯤에서 그냥 접어버리면 
또다시 이렇게 펜을 들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아니 어쩌면
다시는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시작하려고 한다.

지금 여기는 유난히 지리했던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이제 막 기승을 부린다.
이곳의 한여름 무더위란 게 너도 잘 알다시피 사람을 지레 지치게 하는 그런 게 있잖아.
게다가 올해는 유독 잦은 비와 무더위가 번갈아 찾아와 아주 맥을 못 추게 하기도 했다.
비를 좋아하던 너였지만 올 여름의 지리하고 변덕스런 장마비는 너 역시 지긋하다고 여겼을 꺼야.

거기는 어때.
한창 반짝이는 햇살이 온 공기에 가득한 봄날 같니.
아니면 한들하고 청명한 바람이 시원한 가을녁 같을까.
아무렴 지금 여기만큼 종잡을 수 없이 심술궂은 계절같지는 않겠지.
날씨 탓인가, 요즘은 문득 지독스레 무더웠던 그 해 여름이 생각나곤 한다. 

수십 년만의 더위라고 시끄럽던 그 해 여름이었어.
미리 손봐야 하던 걸 미루고 미루다 기어이 견디지 못하고 고장나버린 에어컨때문에
찜통 더위라던 그 한여름에 꼼짝없이 한나절 내내 고생했던 그날.
그게 다섯 해... 아니 여섯 해 전이던가? 정말 새삼스럽다. 기억 속의 세월이란게.
아무튼 숨막힐듯 조여오는 더위를 견디다 못한 니가 냉동실의 얼음이란 얼음을 몽땅 꺼내
온 거실바닥에 쏟아놓았었지. 집에 돌아왔을 때 그 난장판 속에서 천연덕스럽게 앉아 웃던 니 얼굴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어이없는 웃음만 떠오른다.
기가 막혀서 현관앞에 멍하니 서있는 내 손을 덥썩 잡아끌어 얼음조각들이 흩어져있는 그 거실바닥에
끌어앉히고는 시원해? 하고 웃었어. 장난기 가득한 대여섯살 개구장이처럼.

바보같이. 그딴 게 시원할 리가 없는데.
얼음조각들은 이미 녹기 시작해서 거실에 작은 물웅덩이를 만들며 질퍽거리렸고,
옷은 내내 흘린 땀과 물이 뒤엉켜 끈적이는 몸에 들러붙어 갔으니까.
게다가 움직일때마다 등이며 허리에 녹기 시작한 얼음조각들이 찔리고 배겨
결국엔 서로 비명을 지르다가 웃어버리고 말았잖아.

물리적인 시간은 따박따박 흘러가고 있는데, 다른건 그 흐름속에 바래져가기도 하는데,
유난히 이 기억만은 새삼스러워서 지금도 가끔 그때가 생각나면 매번 반작용처럼 혼자 실없는 웃음이 비집고 나온다.
기억이란 참...

지금은 방금 전까지 푹푹 쪄대던 한낮의 무더위가 무색할 만큼 갑자기 후두둑거리는
장대비 소리가 서늘하게 창 밖을 메우고 있다. 그리고 내 앞에는 향이 좋다며 그녀석이 놓고 간 다즐링이 있어.
평소 차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이 향은 정말 그럴 듯하다.
분말로 손쉽게 훌훌 휘저어 나오는 몇 천원짜리 커피 향처럼 가볍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무겁지도 않은 게 오늘 같은 날에는 저도 모르게 손이 가곤한다.

요란하게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향이 좋은 차한잔.

녀석은 알았을까. 이 모든 게 평소 니가 좋아하던 거란 걸.
아니, 어쩌면 그래서 그렇게 불현듯 찾아와 내게 안기고 간걸 지도 모르겠다.

있지. 그 녀석 몇해전부터 그렇게나 집에서 닥달하던 유학길에 기어이 올랐다.
절대 이곳을 안 떠날 것처럼 그렇게 고집불통이던 녀석이었는데 어느날 훌쩍 가벼운 여행을 가듯 훌훌 떠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가볍게, 산뜻하게 내 앞에서 돌아선 녀석의 외로운 뒷모습이, 무겁게 축쳐진 어깨가. 난 알 것 같더라.
아직 잊지 못했다는 걸. 니가 그렇게 여길 떠나고 나서 내내 힘들어했다는 걸.

- 무슨 일이야

내 상처를 끌어안느라 녀석의 아픔은 알고도 모른척했었다는 걸.

떠나기 몇일전이었나. 

그 날은 전날 밤부터 내리는 이른 봄비에 날이 꽤 쌀쌀했는데.
아침 7시도 채 되지 않아서 요란하게 울리는 벨소리에 겨우 몸을 일으켜 나갔더니
녀석은 그렇게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어.

- 어디 못올 데 왔나?

우산은 손에 들려있었는데 머리는 젖어있었다. 

비를 맞은 채 어딘지 스산한 얼굴로.

- 들어와, 춥다.

현관을 비집고 들어오는 휑한 바람이
 
- 이봐 윤 씨

단지 바람, 뿐이었을까.

- 짜잔! 서프롸이이이이이~~즈!!!  나 여기 완전 뜬다.
- .....
- 뭐지, 이 김 새는 반응은?
- .....
- 아, 리액션이 섭섭하네, 이러면 피날레가 후져지는데.
- 결정한 거야?
- 딩동댕~ 히히, 엄청 먼덴데. 인제 나 못봐서 어쩌냐.
- .....
- 여기 뜨면 싹 지워버릴꺼야. 나 원래 구질구질하게 끌어안고 못살잖아.
- .....
- 헤헤, 잘 살아라 윤씨.

초등학생처럼 한 손을 머리위로 번쩍 들어 휘휘 젖으며 활짝 웃고는 뒤돌아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녀석의 젖은 뒷통수를 난 잡아 세울 수가 없었어. 어쩌면 그 뒷모습이 난... 조금 아팠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알 것 같았어. 

녀석이 얼마나 힘든지. 그 젖은 뒷모습이, 늘어진 어깨가 그랬다. 

지금 떠올려도 몸 한쪽이 빗물에 젖어오는 것같은.
 
널 많이 좋아했었는데.
알고도 늘 적당히 모른척 녀석을 대했던 너였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어쩌면 넌 정말 하나도 알지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녀석에 대해. 그녀석의 진심에 대해.
늘 녀석은 그 이상이었으니까. 마지막까지도.

예전에 널 알기전 녀석이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사람은 열심히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그게 살아있는 사람이 인생에 진 빚이라고.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이 있다고.

늘 매사에 시큰둥, 생각따윈 저편에 집어던진 놈처럼 실없던 녀석이 너무나 심각한 눈으로 진지하게 그말을 할때,
사실 나 솔직히 그런 말을 그녀석에게 심어준 니가 궁금했어.
한 아이의 외로웠던 열정과 진심을, 그 인생을 온전히 깨워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누굴까.
그리고 곧 그게 너란걸 알았을땐 뭐랄까. 뭐라 설명하기 힘든 당혹스러움.
나말고 또 그 누군가에게도 니가 그런 사람이라는 게 말야. 어리석게도 난 니가 나에게서만 특별하다고 생각했었나봐.

그래서였을까. 그저 신기한 인연쯤으로 웃어넘길 법한데도 솔직히 그땐 그게 안되더라.
변명하자면 그 녀석만큼이나 나 역시 그땐 어설프고 어렸으니까.
그래서 그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그녀석의 너에 대한 연정들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모르는 척 해야 했던 거 아니.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너의 사소한 버릇들, 행동들, 말투에서 나와 함께 봤던 연극이니 영화얘기까지도.
언젠가는 사실을 다 말해줘야지 했는데 이젠 그마저도 쉽지 않게 되버렸다.
어쨌든 지금은 녀석마저 이곳을 떠난지 반년이 다되가고,
그 유학이란게 몇 해 안에 마치고 올 수 있는 게 아니라, 앞으로도 딱히 만남을 기약하기는 힘들 것 같다.
 
요즘은 녀석이 놓고 간 다즐링이 아니더라도 가끔 마시지도 않는 차를 내리기도 한다.
이제는 제법 집 안에 차 향이 은은하게 배인 게 사내 혼자 사는 집 같지 않아 좋다며
며칠 전 다녀가셨던 어머님께서 설핏 웃으며 그러시더라.
정말 몰라보게 많이 밝아지셨는데, 어쩐지 그 말씀에 난 같이 마음놓고 웃을 수가 없었다.
매번 오실 때마다 애써 밝게 웃으시다가도 마지막엔 어느새 니 기억에 눈가가 한없이 젖어들어가곤 하셨던게
불과 얼마 전이었는데, 어제는 집안에 배인 차 향이 좋다며 오랫만에 정말 편안하게 웃으시는 그 얼굴을 보면서
난 어쩐지 안도할 수가 없었다.
먹먹한...... 기분이었어.
모두가 떠나버린 인적없는 머언 바다 끝까지 저 혼자 밀려나간 그런 막막함. 그런 먹먹함.

잘 지내니.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한번도 네게 제대로 안부를 물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만날 때도 헤어질 때도 우리 사이엔 그 흔한 인사말은 늘 생략이었지. 아무리 되돌려봐도 기억이 안나.
우리사이엔 그런 인사가 필요 없었던 탓인지 아니면 그게 내 좋지 않은 기억력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지내니.

요즘은 유난히 그때의 기억들이 너무 쉽게 희미해져서 몇달 전부터는 여지껏 십년이 넘게 피워왔던 담배를 끊고,
좋은 자리면 한두잔씩은 하던 술마저 입에 대지 않지만 별 소용이 없다.
천천히 모서리가 닳고 빛이 바래져가는 사진처럼 자꾸만 안개처럼 덧씌워 흐려지는 기억들이 아직은 억울하다.


잘 지내니.

시간이란 때론 너무 매정해서 담배를 끊고, 술을 마시지 않아도
너무나 빠르게 과거를 지워가고, 그 지워져가는 시간들 속에서
연약한 흔적조차 붙잡아 두지 못하는 내가 너무 억울해서,
추억하는 것조차 더이상 네게 주지 못하게 될까봐
요즘 나는 시간이, 내 짧은 기억이 원망스럽다.

내 이 원망스러움조차 희미해지기 전에,
다시 이렇게 마주하기가 힘들어지기 전에,
새겨놓은 듯 잊을 수 없을거라 믿었던 추억마저 하루하루 놓쳐버리고
이젠 더 이상 기억하는것 조차 새삼스러워지기 전에

전한다.


난. 잘 지내.
아픔도 무던해져서 이젠 문득 잊기도 한다.

그렇게 계속 살아지고 있다.

 

이젠 조금씩 빠르게 잊혀져가는 추억속에서
너에게 마지막 안부를 전한다.

 

 

 

 


 

2005/07/10-20:59:22
레드퀸의눈물 in alicejo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