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픽은 내가 이제껏 즐겨왔던 일반의 글쓰기와는 좀 달라서, 뚜렷한 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정된 이미지 안에서 뭔가 자신만의 이미지를 재창조해낸다는 것. 뭐 그런 데서 오는 특별한 즐거움이 있었다. 그건 해 보면 안다. 그 중동성 짙은 즐거움을. 물론 일반의 글쓰기로 확장해 보더라도, '글쓰기'는 내게 나만의 '몽상'에 가장 완벽하게 집중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긴한데, 팬픽의 중독성은 그것이 매우 편협하고 제한된 소통의 '관계'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동일한 대상에 대한 팬덤으로 형성된 집단 안에서 인정되고 이해되고 동조되는 그런 비밀스런 '관계'말이다. 그런 남다른 친밀감과 끈적한 유대감으로 발라진 관계위에서 팬픽은 시작되는데, 언뜻봐도 맨날 그 밥에 그 나물일 수 밖에 없는 그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미 형성된 '관계'가 팬픽을 어떤 소설읽기보다 집요하게 독자를 빨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팬픽의 가치는 그 '관계'안에서만 유효하기도 하다. 예를 들어 g아이돌의 ds열혈매니아에 팬픽중독자였던 내가, 어떤 기성작가의 작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보기드문 작품성(!)을 갖추었다 해서 s아이돌의 rj팬픽에 진정으로 몰입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각각의 두 아이돌스의 멀티팬덤을 아우르는 초열혈매니아라면 말은 또 달라지겠지만.
아무튼 그리하여(대충 버무려보자) 여전히 팬픽을 쓰고, 다 쓰지 못한 팬픽을 쥐고 있고, 읽을 팬픽이 없어서 심심해하는 나는 여전히 그 중독의 환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다.